정양진의 역사 르포

단발머리 소녀

竹泉 2012. 8. 20. 07:40

 - 숫총각이 만난 문디 가시나 -

총무과에서 책상을 정리하고 차를 끓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있었다.

당시는 그렇게 학비를 마련하여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공공기관이나 일반 기업체에서 급사 또는 사환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공공기관에서 잔심부름을 시킬 요량으로 부리고 있었는데 그 학생들의 월급은 직원들의 월급에서 일정액을 갹출하거나 사무실 운영비에서 지급하는 방식이고 공식적으로 국가예산에서 급여명목으로 집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학생은 총무과에서 청장 실에 넣을 결재서류가 있을 때 간간히 올라와서 놀다가기도 하고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도 올라와 여직원과 얘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게 그 학생과의 만남의 전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쁜 친구를 소개 해주겠다는 말을 하였으나 크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남에서 들어간 다섯 명의 동기들은 경북에 연고가 없었으므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각자 사무실에서 보낸다거나 가끔 경북 친구들의 초대로 외박을 한 경우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 총무과의 급사는 느닷없이 단발머리 소녀를 대리고 부속실로 들어왔다.

내 친구 박0순 입니데이” “지난번에 말했던 그분이야 인사 드리그레이

0순이라 캅니다.” 소녀의 말투에서 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에서 동생 같은 느낌만 강하게 들어왔을 뿐 이성으로보지는 않았다.

앉아요. 찻물 좀 올려봐총무과 급사에게 차() 준비를 시키고 되도록 의젓해 보이려 애써봤지만 동생처럼 느껴졌던 것과는 달리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고 어색한 필자의 표정은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는지 받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바 없으나 어찌됐던 분위기는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 참한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두 단발머리 소녀들은 이미 이런 계획을 한 것으로 보였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작달막한 키는 아직 소녀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경산 읍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는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 같이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동생처럼 느껴만 졌던 단발머리 소녀 박0순은 그날 이후 일요일에 두서너 번 친구와 함께 청으로 놀러왔었고 제대 후에도 몇 번의 편지가 오갔으나 인연은 더 깊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처음으로 이성을 만났지만 여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못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여자를 보는 눈이 밝지 못하고 품으려는 남자다운 힘이 부족하였을까 단발머리 소녀는 그렇게 필자의 곁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으나 필자 또한 붙들지를 않았다.

대체적으로 경상도 아가씨들이 필자를 사내로 보는 눈이 어두웠거나 아니면 이성으로 보는 시각이 모자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 단발머리 소녀도 이제 고희(古稀)를 바라보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세월이 참 빠르게 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필자가 처음으로 이성을 만났지만 연정을 느끼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그라져버린 데는 전기한 바와 같이 사내다운 강한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사진을 필자가 보더라도 추남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문디 가시나들이 보는 시각은 남자다운 매력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까.

같은 사무실에 여직원들이 대여섯 명 있었지만 데이트를 신청한 아가씨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여자로부터 호감을 받을 만한 그런 인상은 아니었다는 데 동의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 문디 가시나들은 가장 현명한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정양진의 군생활 속으로 4회에 공개된 이등병 사진이 지금의 아내와 함께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판단을 하여 지금까지 후회를 하고 있지 않을까. 맞선을 보던 날 다방 한 쪽 구석, “한 달 봉급이 5000원인데 살 수 있겠오?” 대답은 없었지만 묵시적으로나마 찬성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결혼하게 되지만 그 사람은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 갈 것이 분명한데 타고난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가지를 긁을 때마다 다방얘기만 쏟아내면 바가지 소리가 그치게 되지만 그래도 문디 가시나들 보다 더 현명한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 계 속 -

                    살 구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