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진의 軍 생활 속으로

정양진의 軍 생활 속으로 (제8회) - 돈 다발 내미는 노인

竹泉 2012. 12. 20. 15:23

- 병역법 제211항 및 2항이 규정한 의가사제대 -
경북병무청사는 경북도청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 대구시내에서 가장 번화가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면에서 봤을 때 청사 왼쪽 뒤편으로 아세아극장, 오른쪽에는 대구우체국인가? 대구소방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도청 쪽에서 볼 때 전면에 이층 목조청사(木造廳舍)가 있고 일층에는 각 징모구와 총무과가 있었다. 청사 뒤편으로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및 여군 모병담당 부서 및 문서 수발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층에는 청장실과 부청장실이 있으며 그 사이에 기획실과 부속실이 있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청장 부속실에는 행정주사 1, 여직원 1, 현역 두 명이 근무하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사 뒤편에 좁은 운동장, 운동장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병적관리과, 왼쪽에 휴게실, 뒤편에 동원과 그 뒤에 병사들의 식당과 취사장이 있었다.

1966년 가을로 접어든다. 군 짠 밥이 이 년째로 접어드니 군바리의 틀이 잡히고 작대기 하나가 더 붙어 세 개가 되었다. 그때 병무청장실에서 근무하던 부산 출신의 홍종영 병장의 추천으로 부속실에서 근무하게 되던 날 부속실장인 상주 출신의 김상호 계장을 만나 본 기억은 있으나 병무청장의 면접은 기억나지 않는다.
홍종영 병장은 부산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하였지만 나이는 필자보다 한두 살 위로 한문을 아주 잘 썼으며 언제나 군복에 빳빳하게 쌀풀을 먹여 다림질하여 입고 다녔고 언행이 단정한 멋쟁이 군인이었다.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식당으로 가는 운동장에서 60세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이 필자를 붙들고 물어볼게 있다기에 바로 옆의 휴게실로 들어갔다. 넓지 않은 휴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직원들도 눈에 띄었다.
빈자리를 잡고 마주 앉자마자 고개를 쭉 빼고 낮은 목소리로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의가사제대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보자기에 싼 걸 탁자 밑 공간(간단한 소지품을 놓을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었음)으로 밀어 넣으며 받으라고 한다.
필자는 그것을 차탁 위로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것이 돈뭉치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시대는 그렇게 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병무청 직원에게 줄을 대 자식의 군대를 면제받거나 도움을 받으려는 부모들의 애처로운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의 병역법 제211항은 부가 60세 이상, 모가 55세 이상으로 한 사람 당 토지가 200평 미만일 때 현역기간을 단축 해주는 제도로 생계에 의한 현역기간 단축이다. 2항에 2대 이상의 독자는 부모의 나이와 토지소유에 관계없이 6개월 근무 후에 남은 기간을 단축한다.

이 법률의 취지는 본인의 입영으로 인한 가족의 생계가 곤란하므로 6개월을 근무하면 전역시켜 가족의 생계를 돕도록 하고 2대 이상 독자의 경우는 잘못되어 후손을 못 볼 수 있다는 데 근거한 당시의 병역법은 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간혹 그러한 법률을 악용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직원들이 있어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노인의 아들은 부모의 나이와 토지소유에 관계없이 6개월 근무하면 제대할 수 있는 병역법 제212항에 규정된 2대 독자였다. 군 병사계에 가서 아드님의 인적사항과 입영일자 및 군번을 제시하고 의가사제대신청원서를 내면 6개월 뒤에는 틀림없이 제대할 것입니다.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돈 보자기를 돌려드렸던 사실이 있었는데 외출비가 없어 청에서 주말을 보내야했던 졸병시절이었지만 그때의 판단은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본성(本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不義와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필자는 시대에 맞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하고 입에 넣어준 떡을 먹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되었고 심지어는 바보로 취급받기까지 하였으나 거기에는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볼 수 있듯이 목민관(牧民官)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덕목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거기에는 타고난 천성으로 인한 사고(思考)가 아니었을까.
보자기를 펴보지 않아 돈의 액수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조차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자면 보자기의 두께로 봐 많은 돈으로 추정해 볼 수 있었다.

필자와 같은 시대에 군 복무를 하였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젊은이도 이제 고희(古稀)를 넘겼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노인은 아들에게 병무청의 한 군인에게 의가사제대를 부탁하였으나 돈을 거절하고 돈을 안 쓰고도 의가사제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 계 속 -


 

- 사진 설명 -
왼쪽부터 유형일, 필자,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 출신의 박보기, 글씨를 잘 써 총무과 서무로 발탁된 권경록, 청장실의 부산출신 홍종영, 반 트럭기사, 해병 모병담당관실 해병 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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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진 (jyj3491@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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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욱 (2012-08-06 19:51:05) 14 6
淸廉潔白(청렴결백)정신으로 살아온 죽천선생님의 삶을 높이 우러러봅니다.
김한정 (2012-08-06 11:08:05) 11 9
不義와 타협하지 않았던 죽천선생님의 성격은 지금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정이 있었기에 타의 모범이 됟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면 그때 돈뭉치의 주인공이었던 친구가 옛 일이 그리워 연락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