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진의 軍 생활 속으로’의 연재를 끝내면서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었던 47년 전의 일들을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전역 후 일반사회 속에서 가끔은 영사기의 필름을 다시 돌려보듯 아름다웠던 병무청 생활을 되새겨 보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연유로 글은 쉽게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군대를 갖다온 사람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 저 얘기는 바로 내 얘기야 –라고 자기가 겪었던 군 생활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연재 글에 등장한 사람들과 그때 경북병무청으로 필자와 함께 내려갔던 15명의 동기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했다. 웹사이트에서 14명을 검색한 결과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 출신의 박보기 님을 만날 수 있었다.
거문도 출신의 그 친구는 ‘鄕愁’ 라는 수필집을 내 서점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수필집이 두 사람을 다시 경북병무청 시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군사비밀이란 틀에 갇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묻혀버린 많은 사연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필자가 겪었던 군 생활이 자기들의 군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 간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있었던 사연들을 필자를 통하여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다는 데 동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현실에서 필자가 겪었던 몇 안 되는 사연들이 문서로 공개되어 기록될 수 있어 무척 다행으로 생각한다.
소설이나 시처럼 일정한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고 수필의 특성상 필자가 보고 겪었던 사실들을 되도록 자유로운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지루하지 않도록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가 아닌 필자의 글 솜씨로 그것들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인지에 많은 걱정을 하였던 건 부인할 수 없다.
글 속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하여 명예를 훼손하거나 폄하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우렸으며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었던 그대로 썼다는 데 떳떳할 수 있다.
독자들로부터 글이 지루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전달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고 게재된 용어와 고유명칭 또한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을 쓰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글이 필자의 뜻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는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끝으로 ‘정양진의 군 생활 속으로’를 관심 깊게 봐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보잘 것 없는 글이나마 문서로 남길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한국사진방송 김가중 대표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 감사합니다. -
한국의 야생화 - 대성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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